아버지와 이별하던 작년 늦가을 춥고 텅비었던 세상이 어느새 푸르름으로 가득해졌나요? 아침 출근길 라디오 광고에서 나오는 아버지 날 선물들… 얼른 라디오 채널을 돌려버립니다. 하지만 끝내 안경벗고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냅니다. 길거리를 지나는 노인들이 다 우리 아버지 처럼 보입니다. 다시 안경을 닦고 아무리 찾아봐도 정작 아버지는 안 계시네요. 지금이라도 전화 걸면 반가운 음성으로 이번 주말에 밥먹으러 오라고 하실 것 같은데. 우리가 아버지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아버지는 으례껏 문앞에 나와 환한 미소를 머금고 기다리셨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난 어릴적 아버지의 외동딸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먹어라. 피곤해 보인다. 여기 소파에 누워 쉬었다 가라며 담요를 갖다주시고 우리 딸들에겐 점심 먹으라고 나 몰래 용돈을 건네주시곤 하셨습니다. 수술 후 병원에서 투병 중에도 아버지의 인격은 변함없었습니다. 수 없는 주사바늘이 꽃힌채 아버지는 퉁퉁 부은 두손을 모아 간호사와 의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의식이 있는한 잔잔한 미소를 띄우시니 병원에서도 아버지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간호사가 아버지 등에 난 욕창을 보여줄 때 차마 볼 수 없어 우린 눈을 감았지만 오히려 주변사람들을 안심시키곤 했습니다. 난 아버지의 외로움을 왜 그리도 몰랐을까요? 아버지와 둘만 있는 병실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그리움을 토해 내시며 힘들었던 시간들을 비추셨습니다. 나는 늘 어리석습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오래 아버지 곁에 있을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현실로 다가와 늘 나의 든든한 울타리이셨던 늘 봄날같이 따뜻하게 감싸주셨던 아버지가 차가운 땅속에 묻히셨습니다. 그때부터 난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길잃은 작은 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먹이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사시지.. 일 년만이라도..
아버지가 안 계시니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별로 없네요. 작은 기쁨도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면 큰 기쁨으로 돌아오곤했지요.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하여 늘 나의 건강을 걱정해 주시고 챙겨주셨지요. 얼마전 아버지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오래 전에 한국에서 받은 편지 한장. “선생님은 그 옛날 주일 학교 선생일 때 가난한 아이들이 헌금을 못내면 대신 내주고 하셨지요. 또 길가다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셨지요”(중략). 순간 난 아버지의 딸이라는게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아버지의 손때묻은 낡은 성경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 성경책은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소중한 유산입니다. 언제고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다시 볼 날이 오겠지요. 그때는 아버지 살아 생전 쑥쓰러워 하지 못하던 말 “아버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고 이 세상 최고 멋진 아버지입니다.” 크게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