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코리아 US Life

어느날 어느 고객
클라라안 | 조회 3,437 | 11.07.2011

11월이면 메디케어 고객으로 몸도 마음도 한참 분주하다. 하지만 이번 주말은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날이 싸늘해고나니 내 마음도 착 가라앉는다.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고 꽤가 생긴다.

오늘은 샌버나디오에 있는 노부부 댁에 가서 작년에 가입하셨던 블루크로스 PPO 플랜을 HMO로 바꿔 드리는 신청서만 도와드리고 일찌 감치 집에 들어와 쉴 작정이었다.

할머니가 타 주신 율무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할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는데 그 할아버님은 연상 차고를 오가며 뭔가 자꾸 꺼내다 내 앞에 쌓아놓는다.

크고 작은 두세 개의 박스가 놓였다. “미처 포장을 못했는데 열어보라우”. 해맑게 웃는 까만 머리 한오라기 없이 완전 백발 할아버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소년이고

난 어느새 보물 상자를 여는 호기심 많은 소녀가 되었다. 그 보물 상자에는  예쁜 펜도 들어있고 고급스런 열쇠고리 그리고 손톱 깍기, 작은 줄자, 오뚜기처럼 생긴

칫솔까지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많은 소꼽장난들을 보니  자꾸 웃음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동그란 통을 열어 보니 이크 이건 뭐야?  작고 날씬한 돋보기가 들어있네?!  

뭐야 그럼 난 할머니가 되는거야? 하기야 동화속에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순식간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말고...  하기야 오늘 아침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아물아물 흐려진 글씨들을 힘들게 보며 이제 돋보기 없이 글을 읽는거 무리겠구나 하며 괜히 씁쓸했었는데 정말 필요한 걸 챙겨주셨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더니 덕분에 소꼽장난감 많이  얻었네요. 뭐든지 주고 싶은 마음,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 연세 탓일까??

조금 후 할머니가 한  말씀하신다. “ 이젠 내일이 안보여.. 좋은 거있으면 빨리 빨리 다 써야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저이(할아버지)보고도 제일 좋은 것들 아끼지 말고 쓰라는데 저이는 참 아껴. “아직도 정정해 보이시는 어르신인데 왜 이렇게들 마음이 약해지셨을까? 

이제 겨우 73세이신데...  “그런 말씀 마세요. 아직 머셨어요. 요즘은 90세 100세까지도 거뜬하세요…..

할머니 오늘 비오는 날 할머니 댁에서 마신 따끈한 율무차는 정말 맛있었어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갈 때마다 율무차 주세요. 한 열번 얻어먹고 나면 저도 할머니처럼 은퇴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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