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화로 힘들던 와중에 맞이한 아버지와의 이별
-선우CEO 이웅진
정보통신의 시대인 21세기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때는 옷을 입기 위한 첫 단계인
재단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사 설립 후 10년 남짓 된 시점에서
한창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기존 회원담당 서비스팀 외에
정보통신 분야 인력을 크게 늘렸다.
팀장1명, 팀원3명, 기획1명, 디자이너1명, 서버담담1명,
그 얼마 후에는 소프트웨어 보강을 위해
결혼문화연구소를 설립해서
두 개의 날개를 달았다.
두 연구소 인력만 해도 10명이 넘었다.
당시 결혼업계에 이런 연구소를 둔 회사는
선우뿐이었다.
나는 일단 결정하고 나면
앞만 보는 스타일이다.
내가 모르는 분야였기 때문에
전문가의 권한을 존중했다.
연구소 직원들의 말은 무조건 수용했다.
연차를 많이 써도, 늦게 출근해도
일절 터치하지 않았다.
늘 머릿속의 계산기를 가동하고
사업을 하는 상황임에도
필요하다면 돈이 얼마나 들어도 투자했다.
당시는 IT인력이 많이 필요했던 때라서
그 희소가치로 인해
그들은 큰소리를 치며 일했고,
고용주들은 ‘찍소리’ 못했다.
그들을 얼마나 대접했느냐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당시 종로5가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연구소용 사무실을 세팅한지 얼마 안되서
아직 에어컨이 없었다.
에어컨을 주문했더니 설치까지 며칠 걸린다고 해서
급한 대로 선풍기를 몇 대 놓고 돌렸다.
아직 한여름이 아닌데도 며칠 더웠던 적이 있었다.
연구소 직원들의 덥다는 말에
나는 얼음공장에서 대형 얼음을 주문해서
사무실 중간에 갖다 놓았다.
그만큼 연구소 직원들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줬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온라인 서비스 전이고,
전산망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때라서
큰 손실은 없었지만,
전산화에 투자하고 집중하던 시기에서
많이 실망했고,
고민과 상념이 커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 무렵이었다.
99년 10월 13일로 기억된다.
정릉 사시는 고숙이 전화를 하셨다.
첫 마디가 이 말씀이셨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네. 조카."
60대 중반이 되시도록
다치거나 아프신 적이 없는 아버지셨기에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가 싶었다.
그러더니 다음 말씀.
"근데 사고가 좀 크게 난 것 같아."
그 다음 말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시려고
몇마디에 나눠서 아버지의 사고를 전하신 것이다.
그 순간의 충격이란 것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숨이 안쉬어지고,
눈앞이 안보였다.
눈물이 흐르는데,
수도꼭지가 고장난 것처럼
콸콸 쏟아졌다.
즉시, 택시를 대절해서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차로 4시간 반 거리였는데,
택시비가 35만원 나왔다.
1933년생이신 아버지는
굉장히 엄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예술감각이 뛰어난 낭만적인 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3형제 중 막내셨고,
살기 어려웠던 고향을 떠나
정릉4동에 터를 잡았다.
이후 몇 번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가 계란 행상까지 하시게 되자
아버지는 화양리에서 만화가게를 여셨다.
내가 아버지 만화가게에 함께 살면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던 일화는
이미 앞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늘 빠듯한 형편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시느라
자식들한테 용돈 한번 주신 적이 없던 아버지가
딱 한번 5000원을 주신 적이 있었다.
선우 초창기에 사무실을 자주 옮겨다니는 중에
그 액자를 분실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그 황망한 심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조선일보에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기사를 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모양이었다.
그 얼마 후 한국일보에서 광고를 싸게 내준다고 하여
같은 내용의 기사를 한번 더 냈는데,
내 심정과는 다르게
“아버지 갖고 장사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곳은 선우-미국지사이다.
앨범에 있는 아버님의 사진을 바로 올리지 못해 죄송스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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