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30여년 간 이어진 사업의 궤적을 돌아보면 나는 그전까지 세상에 없던 일을 두가지 해낸 것으로 자평한다.
하나는 이 땅에서 결혼정보회사를 처음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화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결혼정보회사는 처음이었지만, 그 전에 결혼상담소가 존재했고, 그래서 최초라는 표현보다는 원시가내 수공업 방식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첨단서비스로 대중화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책을 빌려서 본다는 개념을 대중화한 것이다.
20대 초반, 리어카에 화장지를 싣고 다니면서 팔다가 화장지를 주로 사는 사람들이 작은 사무실의 경리들이라는 점에 착안, 여직원들이 직접 화장지를 사서 들고 가는 번거로움을 배달 서비스로 해결해주면서 고정 고객이 늘고 있던 무렵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서너배 많은 화장지를 리어카에 쌓아놓고도 그들보다 일찍 하루 영업을 끝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장사수완이 좋았던 것보다는 젊은 사람이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화장지를 사준 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지를 사무실로 배달하면서 난 여직원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많이 목격하곤 했다. 그러다가 화장지 단골 중 하나였던 한국독서문화원에 배달을 다니면서 도서 대여업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화장지와 책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한 사람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은 화장지 거래처를 하나 늘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사업이었음에도 한결 가깝게 다가왔다.
당시 부모님은 서울 생활을 접고 귀향을 하셨고, 나는 형님댁에서 있었는데, (누구)에게서 40만원을 사업자금으로 빌려서 동대문 책도매상에서 책을 100권 사서 도서대여업을 시작했다. 회원 가입비 3천원을 내면 책 한권에 500원을 받았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사무실들을 돌면서 빌린 책을 회수하고, 다른 책을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우선은 집 근처의 작은 사무실들과 병원들을 돌아다녔다.
“무슨 책이든 다 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갖다드겠습니다.”
여직원들은 금세 관심을 보였다. 읽고 싶은 책을 싼 값에, 그것도 배달까지 해준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새로운 서비스였다.
각각 책 4-50권씩 든 큰 가방 2개를 양 어깨에 메고 하루에 수십곳의 사무실을 다니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화장지 장사를 하면서 쌓은 체력과 장사 요령 덕분에 회원은 나날이 늘었다. 기존 화장지 고객층을 기반으로 순식간에 회원 1천명을 확보했다. 그래서 신설동의 작은 사무실을 빌려서 정식으로 회사를 차리고 사명을 ’글벗독서회‘로 했다.
그러면서 보니까 비슷한 회사들이 10여곳 있는 것을 알고는 차례로 인수했다. 인수 비용이 회사 한곳 당 1천만원 정도 들었는데, 사업 초기라 여유자금이 없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빌렸다. 당시 내 신용이 좋은 편이었고, 신용카드가 처음 나오던 시절이라 돈 빌려주는 사람들은 자기 돈이 없어도 현금 서비스를 받아 쉽게 돈을 구할 수가 있었다.
형님댁 작은 방에서 혼자 시작한 사업은 이내 직원이 4-50명 될 정도로 커졌다. 회원수도 1만명을 넘었다. 확장일로에 있던 사업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모 스포츠 신문의 (김동국 기자) 사회면에 실리고, KBS<전국은 지금>이라는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영업도 잘하고,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딱 하나, 재정관리 능력이 안되는 것이 결정적인 오류였다.
무리하게 남의 돈을 빌려서 사세를 확장하면서도 절제가 없었다.
그것이 결국 내 발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