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많은 사람을 만나는 만큼 말도 많이 한다.
상황에 따라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먼저 나서기도 한다.
옛날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웅진이 많이 변했다. 말수 적고 내성적인 애였는데..”라고들 한다.
화장지 판매, 그 뒤를 이은 도서대여업을 하면서 내성적인 내 성격은 사교적으로 변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품을 한번 팔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근처 사무실을 돌면서 소모품인 화장지를 지속적으로 구입할 고정고객을 확보해서 배달해주고, 또 화장지 구입처에서 꾸준하게 책을 빌려서 읽는 회원들을 확보하고, 이런 식으로 영업방식을 확장하면서 내 자신이 사람을 관리하는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회원관리 사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기존 화장지 고객층을 기반으로 순식간에 회원 1천명을 확보했고, ’글벗독서회‘라는 사명을 걸고 10여곳의 도서대여업체를 차례로 인수하면서 짧은 기간에 규모가 커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책을 빌리는 고객들의 90%는 여성들이었다.
20대 중반의 미혼이었고,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 외모 덕을 본 건지, 1주일마다 책을 교환해주러 갈 때면 기다리거나 반겨주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여성과는 데이트도 했다. 북한산 승가사 인근의 세검정으로 함께 등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오늘로 말하면 벤처사업가였다. 백그라운드도 없고, 맨주먹으로 책이나 빌려주는 내가 비전이 없어 보였는지 그녀는 얼마 후에 돌아섰다.
또 한명의 여성회원은 치과 간호사였는데, 어느 날인가 갔더니 병원 스텝들이 다 퇴근한 후 혼자 있다면서 치아 스케일링을 해줬다. 그 전까지는 한번도 스케일링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회원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대부분은 싱글이었고, 나도 같은 상황인지라 얘기가 잘 통했다. 한번은 회원 중에서 남성 5명, 여성 5명과 함께 등산을 갔다. 등산모임이 그렇듯 산을 타고 내려와서 막걸리 한잔 하는 일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3쌍이 교제를 하더니 1쌍은 결혼을 했다.
또 한번은 친구 1명, 그리로 신설동 여성회원과 그 동생, 이렇게 넷이서 생맥주를 마셨는데, 친구와 회원의 여동생이 결혼을 했다. 이렇게 회원과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면 결혼커플이 나오는 일이 계속 있었다.
이런 일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생각, 또 남녀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면 커플이 만들어진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이어지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종각데이트, 동그라미 이벤트 같은 이름으로 폰팅이 성행하고 있었다. 남녀 만남의 패턴이 펜팔에서 즉석미팅식의 폰팅으로 바뀐 것이다.
그 외에 결혼상담소가 간혹 눈에 띄었는데, 책 세일즈 하러 들어가 보면 할머니들이 앉아있었다. 남녀 회원들이 어울려 활기차고 자연스럽게 만났던 모임을 생각해보면 그런 분들이 주선하는 경직되고 어색한 만남에서 벗어나 신선한 방식으로 남녀 만남을 주선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지금이야 결혼정보회사의 제대로 된 시스템과 규모를 갖추고 축척된 노하우가 있지만, 처음 이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는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서양식 파티 같은 만남의 개념이 단초가 되었다.
그 즈음, 승승장구하던 도서대여업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40만원의 종잣돈으로 시작해서 주변에서 돈을 빌려 인수합병을 계속 했다. 마지막으로 11번째 회사를 인수하고 천하통일을 했다는 성취감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니 엄청난 화원카드와 산더미 같은 빚만 남아있었다.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빚을 지고,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한테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가진 아버지는 소 몇 마리를 키우셨는데, 내가 사업자금을 부탁드리자 평생 처음으로 그 귀한 소를 팔아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2천만원을 마련해주셨다.
말수가 적으신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돈을 써라. 사람 조심하고 일이 잘된다고 절대 방심하지 말라.” 당부하시면서 팬티 속에 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안에 돈을 넣어주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나의 자만과 관리 소홀로 그 피 같은 아버지의 돈까지 날리고 말았다.
그리고 난 빈털터리가 되었다.
절망의 시간을 보내던 중 예전에 했던 파티식 만남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닐 때 은사혔던 김동일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신설동 학원의 작은 강의실을 빌려서 ’선우이벤트‘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 때가 11월 말이라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염두에 두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오늘날의 선우의 태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