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회 사업 실패는 충격이 컸다.
주변에서 끌어모은 돈에다가 아버지가 자식 같이 기르신 소를 팔아 마련해주신 돈까지 다 날렸으니 그 좌절감과 막막함은 이루말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은 암흑의 시간을 보내던 중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내 삶에 한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독학학원 시절 은사님이신 김동일 선생님을 무작정 찾아갔다.
파티식 만남에 대한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사무실 얻은 돈은커녕 전화 한 대 놓을 돈도 없는 무일푼 이었다. 작은 학원을 운영하시는 빠듯한 형편에도 선생님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최선을 다하면 길이 열릴 거야.”라고 격려하시면서 선뜻 강의실 하나와 전화 한 대를 빼주셨다. ‘모인기획’이라는 이름으로 미팅사업을 시작했다. ‘모인기획’은 독서회 사업을 할 때 내가 인수했던 도서대여업체 중 한 곳의 이름이었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결혼상담소가 있었지만, 고작 직원 한두명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꿰어맞추듯 연결시켜 주는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만남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자금이 적게 들어가는 폰팅으로 시작해서 좋은 회원들을 많이 확보하면 그것을 보고 미혼남녀들이 계속 가입할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최초의 문의전화를 건 사람은 유부남이었다. 내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은 폰팅을 남녀의 불건전한 만남을 연결하는 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은밀한 만남을 원하는 유부남, 유부녀들이 많았다.
오는 전화만 받아서는 자리잡기가 힘들었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아이템이 필요했다. 싱글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기획했다. 한사람당 참가비를 3-4만원 받고, 2천명을 모으면 6-7천만원이 생기니까 그 돈으로 재기를 하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당시는 남성이 비용을 내면 여성이 만나주는 묻지마식 만남이 성행했고, 그런 업체들이 전국적으로 100여개 이상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회사들은 스포츠신문에 따닥따닥 광고를 내는데, 나도 신문사에 외상으로 광고를 냈다. 결과는 실패였다. 광고비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내 자신에 대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것은 웬만해서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긍정의 마인드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물려주신 유전자이다. 어머니는 극도의 가난 앞에서도 결코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럴수록 힘을 내어 자식들을 격려하셨다. 당시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 했다.
나는 전단지를 만들어 거리로 나갔다.
시내 번화가, 사무실 밀집지역은 물론 지하철도 탔다.
지금이야 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상인들을 자주 보지만, 당시만 해도 나 같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웅진이라고 합니다.”로 시작해서 한국의 결혼문화를 바꿔보려고 한다, 건전하게 만날 좋은 사람을 소개해드리겠다, 고 소리쳤다. 분위기는 썰렁했다. 머쓱해져서 지하철을 내리면 꼭 한두명은 따라내렸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직장인도 있었다. 그렇게 한명, 두명 회원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순간 직감했다. 학원은 교육사업을 하는 곳인데, 여기서 미팅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사무실 얻는 데 보태라면서 2백만원을 빌려주셨다,
이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또 하나 큰 선물을 주셨다.
‘좋은 만남을 주선하는 의미있는 일을 하라’는 뜻에서 선우(善遇)라는 회사명을 지어주신 것이다.
그렇게 학원에서 독립을 해서 신설동 로터리의 한 낡은 빌딩 5층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선우이벤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회원 유치에 돌입했다. 선우의 시작이었다.
선우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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