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시절 십일조 조세와 오늘 (2)
3. 역사적인 십일조
성경시대에 수많은 제사와 조세명목이 있었다. 신약 시대에서는 교회 자체 내의 선교비, 구제금, 의연금, 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들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금 조성으로 교우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밤낮으로 노동을 했다고 한다. (1 데살로니카 2:9-10) 당시에 이러한 십일조와 다른 여러 명목의 각종 세금을 합하면 수입의 13 % 정도가 지출되었다고 Luther P. Powell 이란 신학자는 주장한다.
초기 교파 시대에는 십일조를 거두어서 (1) 하나님에 대한 세금 (2) 레위인들 (3) 성직자 (4) 종교 제사 비 (5) 과부, 고아, 방랑객 등의 가난한자 도움 (6)비상시를 위한 비축 (7) 공무원 월급 (8) 국가의 공공시설과 관리 비용 (9) 합창대원 (10) 수위를 위해서 사용했었다.
교회의 탄압이 시작된 Nero 황제 전후 4 세기 동안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십일조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A.D. 321 년 ”콘스탄틴 (Constatine)“ 황제 때부터 교회가 정치와 종교를 다시 겸하게 되면서 십일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 (Gregory)“ 교황 시대인 A.D. 585 년 공의회에서 법으로 십일조를 지불하라는 것이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때에 처음으로 십일조는 첫째 교회를 위해서, 둘째 성직자, 셋째 가난한자를 위해 지불하라고 주장했다.
A.D. 1017 년에 ”카메라 (Camera)“ 혹은 ”쳄버 (Chamber)“ 라고 부르는 재정 담당하는 부서가 생겼고 ”알렉산드 (Alexander)“ 3 세 때에는 십일조, 헌금을 받아 남는 돈으로 이자 놀이를 하면서부터 십일조 강요가 극심하게 되었다. 이때에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까지 바치게 했다.
1196 년부터는 월부금 제도로서 십일조와 헌금을 지불하는 새로운 제도가 생겼다. 물론 영국이나 독일 등의 나라 왕도 지불해야만 했다. 이러한 강요에 의한 해방을 선언한 사람이 영국의 ”헨리 (Henry)“ 3 세 였다. 즉 교황으로 부터 정치, 경제의 권한을 쟁취하여 독립하겠다고 했다. Henry 왕의 선언을 뒤따라서 성직자나 일반인들도 구약의 십일조 해석을 성경의 근본정신에 입각해서 따라야 한다. 현재의 구약 해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다.
이때만 하드라도 문맹자가 많았는데 1439 년에 ”구텐버거 (Gutenberg)“ 의 인쇄기 발명으로 성경이 인쇄되기 시작하자 지식층과 일반인들에게 성경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성경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당시 십일조 강요에 지친 농부들은 ”십일조를 교회에 까지 갖다가 줄 여유가 없으니 너희가 수확을 해서 갖이고 가라“. ”하나님은 우리를 약탈자 성직자로부터 구해 주셨다. 성직자는 우리의 추수와 빵을 강탈한다. 성직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요 한 후 우리의 입안에 들어올 양식을 뺏어 간다”고 까지 노래를 만들어 항쟁했다.
Europe의 국가에서는 십일조를 지불하지 않으면 유치장 살 이를 하기도 했다.
이 당시부터 1600 년 이후까지 교파 간에도 십일조에 대한 찬성과 반대 분쟁이 많았다. 개신교의 교파 내에서도 루터교는 찬성이었고 다른 몇 교파들도 반대 했는데 특히 퀘이크 (Quaker)교단에서 극심한 반대를 했다.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든 재산을 받았느냐 ? 아직도 하나님은 자기 재산중의 1/10은 자기 소유로 보관하고 있으므로 십일조를 바칠 이유가 없다고 했다.
1517 년 10 월 31 일 ”루터 (Lutter)“의 종교 개혁도 교회 부패의 대표적인 부정부패로서 성물 판매, 면죄부, 교회 재정 등등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추방하자는 선언을 한 것이다.
”루터 (Lutter)“가 주장한 십일조의 개혁은 ;
1. 구약 정신되로 빈농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자. 2. 곡식으로 바치라. 3. 성직자를 위해서 바치라고 주장했다.
이 이후부터 다시 십일조의 강요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었다.
1931 년 독일에서는 십일조의 조세율이 종파에 따라서 변경되었다.
이스라엘 교인은 12 %, 천주교는 8 %, 루터 교인은 7.5 %를 지불하라고 제정되었다.
4. 미국의 십일조
영국의 ”제임스 (James)“ 1 세 왕 시대인 1606 년 144 명이 미국에 건너온 이후 1622 년 까지 6000 명의 인구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고 생존자는 당시에 2000 여명이 남아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영국의 십일조 강제 징수로부터 해방이 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쟌 스미스 (John Smith)“ 목사가 주창하기를 구약은 강제적인 강요의 수완이다. 그러나 목사가 생존할 정도의 돈만 지불하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지불하게 되었고 이제도를 배우기 위해서 ”쟌 라빈슨 (John Robinson)“ 목사가 영국으로 부터 미국에 건너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사에 의한 십일조 제도에서는 목사의 생존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자 1630 년 메사수세츠 주 법정에서는 목사는 정부로 부터 생활 보조비 (public charge)를 받을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1644 년 10 월 25 일 콘네딧카드 주에서는 목사의 생활비는 일반 시민의 세금에서 지불하였다. 버지니아 주에서는 목사의 연봉을 담배 16,000 파운드를 지불하였다.
1784 년 4 월 6 일 종교의 자유란 법의 제정과 함께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지불하게 되면서 오늘과 같은 십일조 강요가 다시 시작되었다.
1930 년대에 와서는 교회에서 경품권, 복권, 부동산 투자, 보험 판매를 하면서 교회가 기업체로 변신된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에서 돈을 징수하는 방법이 지능적이고 경영적인 측면으로 변화되어 갔다. 먼저 예산을 세운다음 십일조를 지불 할 수 있겠끔 구약 성경 공부를 시킨다. 교회내의 조직을 만들어서 승진, 약속금 결정, 젊은이들로 하여금 헌금 징수, 교무 담당자들이 교인들에게 권유하는 방법 채택, 직업적인 선전 인물을 채용하여 징수하는 방법, 돈 지불을 쉽게 하기 위하여 봉투를 제공하였고 회계 장부 기록을 신속히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외에도 누가 얼마를 지불하였다고 광고를 하여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자기 교회의 어느 누구가 얼마를 지불하였다고 지방 신문에 까지 광고를 하였다. 1924 년 2 월 16 일자 “문학 (The Literary)”이란 잡지에 “현기증 나게 만드는 목사”란 제목으로 어느 교회 목사가 지방 신문에 까지 광고를 내었다고 규탄하고 있다. 또 흔히 사용하는 다른 방법은 십일조를 지불함으로 해서 가난하였든 누가 부자가 되었고 사업에도 성공을 하였다고 하면서 심리적으로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수단을 사용 한다
김희영 김희영 부동산 (951) 684 - 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