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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크라멘토 강 학살사건 - 1부
Artchocolate | 조회 1,517 | 05.02.2024
* 새크라멘토 강 학살사건 - 1부


1845년 경, 캘리포니아에는 미국과 멕시코 전쟁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며 만사가 뒤숭숭한 시절로 접어들었다 .

그러나 전쟁 소문은 소문일 뿐, 누구 하나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해 겨울인 1845년 12월 10일, 프레몬트와 칼손 그리고 62명의 미군 그리고 수렵 사냥꾼들과 12명의 델라웨어 인디언들로 구성된 조직이 캘리포니아의 셔터 요새에 도착했다. 

조직의 리더인 프레몬트(Frémont) 대위는 미 정부로부터 그레이트 베이슨(Great Basin)지역과 멕시코 소유인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토질 측량을 하기 위한 탐험대를 이끌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의 62명의 대원은 토질 측량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는 것과 더군다나 의심스러운 점은 그들이 완전무장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실제 임무는 캘리포니아의 멕시칸 군대를 도발하여 전쟁의 빌미를 만들며, 또 한,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미국인들을 선동하여 캘리포니아를 점령하는 것이 그들의 미션이었던 것이다.

이는 텍사스의 선례를 재탕하려는  당시의 대통령인 제임스 포크의 밀명이었던 것이다.

서부 알타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자마자 프레몬트와 그의 부하들은 몇 달 동안  북쪽 캘리포니아 지역의 여러곳으로 이동해 다니면서 

멕시코 당국에 도발을 꾀하고 그곳에 정착한 미국민들의 불만과 애국심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자 마침내는,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병력이 그의 도발에 대응하여 그들의 진지를 포위하려하자 그의 부대는 슬그머니 진지로부터 철수하고는 홀현히 사라져 버렸다.

그 후, 1846년 3월 30일, 그의 부대는 지금의 오리건주로 이동하던중 새크라멘토 강 상류에 있는 Lassen Ranch 지역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1,000명의 인디언으로 구성된 야영지가 백인 정착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인 정착민들을 만났다.

이에 프레몬트는 그 인디언 부대가 캘리포니아 멕시칸 군대의  연합부대일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

그의 부대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강 상류를 따라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당시, 프레몬트의 부대는 백인 60명, 델라웨어 인디언 9명, 캘리포니아 인디언 2명, 인근 교역소 회원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행은 1846년 4월 5일 레딩스 랜치 (현재 캘리포니아주 레딩 근처 )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대규모 인디언 캠프를 발견했다.  

그 지역은 수백 평방 마일에 달했으며 5,000명이 넘는 윈투(Wintu)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프레몬트 대위는 그의 부하 모두에게 소총, 권총 두 자루, 칼을 들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군인들은 윈투(Wintu)족 마을의 삼면에서 공격하였다. 

대부분의 인디언 주민들은 여성과 어린이였고 마을의 뒤쪽으로는 새크라멘토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탈출할 방도가  없었다.

겂에 질린 여자와 어린이들은 강가쪽으로 이동했지만 강이 가로 막혀  꼼짝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윈투 진영의 남자 인디언들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방어선을 형성했다.

당시, 원정대원으로 참가했던 "Thomas E. Breckenridge"라는 대원은 훗날 "한 놈도 남김없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진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프레몬트의 병사들은 줄을 서서 여러 발의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그들 앞에서 인디언 남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총의 사거리가 길어 인디언들의 화살이 그들에게 닿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다음 군인들은 캠프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 근접 거리에서 또 다른 일제 사격을 가한 다음 세이버와 권총을 들고 돌진했습니다." 

브레켄리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을 이어갔다.

"많은 인디언 전사들이 쓰러졌고, 마을로 돌진한 군인들, 그 후, 서양에서는 유례가 없는 학살의 현장이 펼쳐졌습니다."

 "그들 인디언들은 들소떼처럼 학살당했고  대원들은 살아있는 짐승을 도살하듯 돌아다니며 무차별사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나머지 살아남은 인디언들의 일부는 언덕으로 도망갔고 다른 일부는 용감하게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목격자 "William Isaac Tustin"이란 사람은 "말을 탄 프레몬트 무리의 군인들이 언덕으로 도망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가 노인과 여인들을 학살했고, 소총수들은 강변에 서서 안전한 곳으로 헤엄치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강건너 편에는 다른 미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따라서 불행한 인디언들은 강 양쪽에서 쏘는 총격에 맞아 죽었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장면을 '학살'이라고 표현했다. 사상자 추정치는 다양하다. 

원정대원이었던 Thomas E. Breckenridge와 Thomas S. Martin은 살해된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가 각각 "120-150명" 및 "175명 이상" 이라고 
주장 했고, 목격자인 Tustin은 적어도 600-7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육지에서도 사망했지만, 물 속에서도 200명 이상의 여자와 어린이들이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학살로 인해 미군대원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기마 공격자 중 한 명인 '키트 칼손'은 훗날 법정에서 "완벽한 도살이었습니다." 라고 당당히 증언하기도 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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