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 없는 사건>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정복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문제였던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리더쉽의 결핍을 들수가 있겠다.
포크 대통령의 사람들인 스톡톤, 프레몬트, 질레스피. 이들은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평화적으로 지배하는데 대한 적합한 인물이라고 평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캘리포니아 거주자들의 입장을 전혀 심사숙고 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어떻게 보호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슬러트 사령관이 발표했던 캘리포니아 주민들과의 약속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치발드 질레스피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8월 13일에 로스앤젤레스 시의 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그는 미군을 환영한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은 당연히 새롭게 시행하는 법도 환영하는 줄로 착각하였다.
역사학자인 데일 워커(Dale Walker)는 그의 실패를 이렇게 분석하였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로스 앤젤레스 시민들에게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해가 지면 모든 상점은 문을 닫는다
각 가정의 무기 소유는 불법이다.
사적인 모임은 불법으로 간주한다
집안에서의 가족 모임도 불법으로 간주한다.
계엄 사령관의 허가 없이는 술 판매도 불법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불법이다.
도심의 광장을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도 불법이다.
남녀가 함깨 춤을 추는 것도 금지 조항이다.
만일, 이 조항들을 어길 시에는 반역으로 인정되어 벌금을 물게 되거나 혹은 청문회 없이 감옥 살이를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정책은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슬러트의 정책과는 거리가 아주 먼 정책이었으며 자유와 평화롭게 살아왔던 캘리포니아 거주민들에겐 그야말로 ‘창살없는 감옥’ 같은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조항 모두가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에게 미군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정책을 발표한 지 5주 후에 로스앤젤레스 주민들의 ‘대규모 반대 시위’에 부딪쳐야 했고
9월 말에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대장이 이끄는 캘리포니아 군이 급히 조직되었고
10월 4일, 미 군정의 질레스피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은 무장 해제를 당한 후, 추방되어 샌페드로 항구에서 배를 타고 샌디에고로 향하게 되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