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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랜초 시대 - 캘리포니아 목장주 그들의 삶
Artchocolate | 조회 9,569 | 05.08.2019

캘리포니아의 해안을 넘나드는 영국과 러시아를 견제 하기 위해 시작된 캘리포니아의 정착은 21개의 미션과 함께 1769년의San Diego 요새1770Monterrey요새, 1776 San Francisco 요새, 1782 Santa Barbara 요새를 완성했으며 요새의 주둔중인 군대의 식량 담당을 위해 샌 호세 농장 [1777]과 로스앤젤레스 농장[1781]이 건설되었고 1784년부터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여기 저기에 거대 목장들이 생겨나면서 캘리포니아는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캘리포니아 탐험에 참가했던 군인들을 필두로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토지의 대부분은 상당수의 소나 양을 들여와서 목장(Rancho)으로 탈바꿈되면서 그들의 가족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며 아울러 크고 작은 수 많은 목장의 주인들이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시대가 되었다.

 

점차적으로 교회가 아닌 목장 주들이 경제와 정치와 사회의 전반을 컨트롤하기 시작했으며 캘리포니아를 낙농 세계로 만들며 많은 외국 선박들과의 무역도 주로 목장 주들이 주도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도 자기의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남자들은 농장과 목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여자들은 집안일을 한다.

 

그들에게 가장 즐거운 날은 가까운 해안에 러시아 혹은 유럽 상선과 미국 상선들이 도착하는 날이었다.

 

엄연히 스페인 법으로는 금지된 밀무역이었지만 캘리포니아 목장 주 가족들에게는 새로운 유럽 상품이나 미국 상품을 쇼핑하고 구입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신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파견된 캘리포니아 정부도 이를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훗날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Jose Dario Arguello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한마디로 묘사했다.


정상적 무역인가 밀무역인가는 법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판단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아무튼그들은 뱃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쇠고기와 농산물을 제공하는 대신 유럽 산 혹은 미국 산 생필품들을 구입했는데

 

그러한 밀수 상선이 도착하는 날이면 처녀들도 예쁘게 차려 입고는 나들이를 나선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뱃사람이라도 만나면 바로 집으로 초대해서 데이트를 즐긴다.

 

부모들도 마음에 들면 딸과 결혼시켜 데릴 사위로 삼아 캘리포니아에 정착 시켰다 한다.

 

당시의 목장 주는 가족 구성원의 수장이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복종했으며 아내들도 그들의 남편들에게 절대 복종했었다고 한다.

 

당시 캘리포니아 법에는 사나운 남편에 대해서 아내를 보호하는 보호법도 있었는데이름이 이게라[iguera]라는 한 남편은 질투에 화가 나자 아내의 머리를 몽땅 자르는 바람에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남편들이 목장을 운영하고 아내들이 가정을 돌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가 직접 목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당시 캘리포니아 내의여 목장 주는 대부분이 독신이거나 과부였다.

 

Maria Lopez Carillo라는 여 목장 주는 1792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남편이 사망하자 소노마 밸리로 가서 목장 경영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인디언 언어까지 습득하자 정부가 그녀에게 9000에이커의 대지를 하사하였다.

 

그녀의 목장에는 3000마리의 젖소가 있었으며 과수원과 채소 농장과 곡식 농장을 곁들였다고 한다.

 

당시 그들의 집은 4인치 정도의 태양광에 굳은 흙 벽돌과 그 밖의 재료와 함께 지어졌다고 한다.

 

그들 가족은 결혼식이나 생일 파티 같은 모임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며 이벤트를 즐겼는데 목장과 목장 사이의 광활한 평원에서 사람이 몹시도 그리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자리에는 대부분 그 고을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서 함께 즐겼으며 또한당시의 다른 이벤트로는 곰 싸움소싸움과 닭싸움개싸움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캘리포니아 전체에는 초등학교가 3군데밖에 없었다고 하니교육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가끔씩 떠돌이 여행가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캘리포니언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 머물 때까지 의식주를 모두 제공해 주었고 떠날 때에는 노자 돈에 말까지 챙겨주는 여유로움을 누렸다고 한다.

 

당시의 캘리포니아는 사람이 귀하고 생활이 풍족하다 보니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뉴욕으로 돌아간 한 미국인 여행자는 대륙 건너 먼 곳에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 곳은 1년 내내 따뜻하고 풍요로운 과실이 넘쳐나는 낙원이라고 선전하는 바람에 미국인들도 점차적으로 캘리포니아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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