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5월 21일 마침내, 레자노프가 탄 러시아 상선 쥬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의 상선은 본래 목적지였던 Sitka에 정박하여 그곳에서 식량과 보급물자를 내렸다.
시트카에서 일을 마친 후, 그는 항해를 계속하여 시베리아 대륙으로 방향을 잡고 캄차카 반도 쪽으로 향하였다.
바다 건너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Petropavlovsk]에 정박한, 레자노프 일행은 시베리아를 가로 질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육로를 선택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 간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자노프는 가는 도중에 세 번에 걸쳐서 폐렴을 앓았지만 겨울이 닥치기 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제대로 치료를 마치기 전에 강행군을 시도하곤 하였다.
그러나 시베리아 벌판은 너무나도 넓고 광활했다. 말을 타고 가기에도 너무 먼 거리였다. 더군다나 시베리아의 겨울은 생각보다도 일찍 찾아온다.
레자노프 일행은 겨울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행군을 지속하였지만 해가 바뀌어도 시베리아의 추위는 지속되었고 강한 눈 폭풍의 영향으로 눈 속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추위와 소진, 그리고 다시 찾아온 폐렴 등으로 인해 건강이 몹시도 악화되었지만 그는 일행을 다독거리며 계속 말을 몰아 진군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참 후, 눈보라를 헤치며 앞서 가던 레자노프 는 그의 말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가 싶더니 스노야르스크 Krasnoyarsk] 인근의 눈밭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1807년 3월1일이었다.
한 편, 약혼자의 사망 소식을 전혀 모르는 콘치타[Consepcion Argüello]는 결혼할 날만 꿈꾸며 수년 동안 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캘리포니아에서 시베리아까지 레자노프 와 함께 여행했던 러시안 장교가 다시 캘리포니아에 오게 되자 이 안타까운 소식을 콘치타에게 알려주었다.
“레자노프 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했어요.”하며 러시아 장교는 그녀의 손에 자신이 레자노프에게 주었던 머리카락이 보관된 목걸이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의 도장이 찍힌 결혼 승락서를 쥐어 주고 돌아섰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새로운 남자를 만날 것을 권고했지만 그녀는 일편단심이라는 순애보 쪽을 선택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남은 일생을 도미니칸 자매 회에 가입하여 수녀의 삶으로 하나님께 헌정하며 살다가 1857년, 콘치타는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시신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동북쪽의 작은 마을Benicia에 묻혔다.
그녀가 묻힐 때 그녀의 품에는 레자노프 에게 샀던 레이스 스카프와 머리핀 그리고 사랑의 징표였던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와 곱게 딴 그녀의 머리카락이 보관된 목걸이와 러시아 정교회의 결혼 허가서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콘치타와 니콜라이 레자노프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캘리포니아에서는 남녀의 사랑 싸움에 좋은 본보기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지만 러시아에서는 주인공 레자노프 소유의 선박들 이름을 딴 ‘주노와 아보스’ 라는 제목의 록 오페라를 무대에 올려 니콜라이 레자노프 와 콘치타의 사랑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켜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묻혀있는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기념관에는 러시아 정치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제목의 스토리와 함께 그의 십자가 한 쪽에는 “나는 결코 너를 잊을 수 없다”라는 글귀와 다른 쪽에는“나는 결코 너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한다.
국적도, 언어도, 나이도, 문화도, 종교도, 불문한 채 오직, 사랑의 힘 하나 만으로 맞섰던 그 시대의 로맨스로 자리매김한 사랑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