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위 사진)
컬럼비아 강, 미주리 강, 로키 산맥을 처음으로 정확히 묘사한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의 지도(아래 사진)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오래 전부터 북아메리카대륙의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미시시피강의 서쪽 지역은 모두 미지의 땅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다.
미주리 강 인근의 인디언 세계 (지금의 노스다코다 주 비즈마크 위쪽에 해당되는 지역)와 오리건 지역의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컬럼비아 강의 상류 지역 사이의 1000여 킬로미터 구간의 지역을 탐험한 유럽 인은 당시 단 한 명도 없었다.
제퍼슨은 이 지역의 탐험이야말로 미국인의 임무라고 믿었다.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서 구입된 루이지애나로 인하여 미시시피강의 동쪽에 제한 되었던 미국의 영토가 로키 산맥까지 확장 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앞날을 내다 본 토머스 제퍼슨은 그 동안에 꿈꿔왔던 로키 산맥 일대의 탐험을 그의 비서인 Meriwether Lewis[메리웨더 루이스] 대위와 William Clark [읠리엄 클라크] 중위에게 대륙의 서쪽 끝인 태평양까지의 탐험과 지도 완성을 지시하였다.
이에 40여 명으로 구성된 탐사대원들은 세인트 루이스에서 고도의 훈련과 함께 식물학, 기상학, 동물학에서부터 천문 항법, 약간의 인디언 언어들, 목공일, 총기수리, 보트 취급 법 등의 전문 교육을 받았다.
당시 세인트 루이스는 미국의 마지막 문명 지역이었으며 그 미시시피강 건너의 서쪽 지역은 인디언의 세계였다.
그 이후로도 세인트 루이스는 서부 지역으로 향하는 모든 이민자들의 집결지역이 되었다.
세인트 루이스애서 겨울을 보낸 뒤 1804년 5월 14일, 탐사대는 미주리 강에서 3척의 보트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루이스와 클락크는 탐사 대원들과 함께 장비와 물자를 싣고 미시시피 강의 발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에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지금의 노스다코다 주에 도착하는데만 6개월이 흘렀다.
그 해 11월에 루이스와 클락크는 그 지역에 요새를 짓고 겨울을 나는 도중 프랑스인 사냥꾼을 만났는데 그의 아내인 사카자웨어는 인디언 여성으로 여러 인디언 종족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인디언들과의 언어 소통을 위하여 사카자웨어 같은 통역사가 필요했던 루이스 일행은 이 부부에게 함께 여행 하기를 간청하여 결국, 동의를 얻어냈다.
루이스 일행은 사카자웨어의 안내와 통역을 받으며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가 지금의 몬태나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말을 구입하여 로키 산맥 분수령을 넘어 마침내 클리어워터 강 상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는 카누를 만들어 클리어워터 강을 따라 내려간 일행은 마침내 스네이크 강에 도착하였고
11월 15일에는, 컬럼비아 강 어귀를 거쳐 마침내 목적지인 태평양 연안에 도달 할 수가 있었다.
이들은1805년 12월, 그곳에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딴 Fort Clatsop(클랫소프 요새)를 짓고 겨울을 보냈다.
다음해 3월, 돌아가는 길에 루이스 일행은 사카자웨어에게 백악관까지의 동행을 희망했지만 그녀는 고향인 로키 산맥에 남아 있기를 희망하여 결국 루이스 일행과 작별하게 되었다.
마리아스 강과 옐로스톤 강을 지나 미주리 강을 따라 내려가 1806년 9월 23일, 문명의 끝자락인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했다.
1804년 부대를 이끌고 세인트 루이스를 출발한지 3년 여 기간 동안 미지의 땅을 탐험하여 지금의 오레곤 주의 태평양 연안까지 둘러 본 루이스 일행은
단 1명의 희생자를 빼고는 모두 무사히 워싱턴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후에, 이들이 작성한 지도와 보고서는 미국인들의 서부 진출에 중요한 정보로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오레곤 지역의 영토 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