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탐험대의 성직자들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서면 그날이 어느 성자의 날인가를 따져서 이름을 짓곤 하였는데 1769년 10월 24일, San Gregorio[성자 그레고리오] 날에 도착한 지역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 San Gregorio 골짜기인데 아직도 존재하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문 후 10월 27일에는 Purisima Valley[가장 순결한 골짜기]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갔으며 ‘말과 소에게 물을 먹인 작은 호수’ 라는 뜻으로 Lago de Pilarcito[라고 데 필라르시토]라고 이름 지은 호수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아직도 존재하는 이 같은 이름들을 지어가며 지금의 Skyline Blvd길을 따라 북상하여 11월 4일에는 지금의 공항 인근 호수인 San Andreas 호숫가에서 캠핑을 한 후 82번 El Camino Real F.Way를 따라 금문교 입구까지 도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의 금문교 입구 지역에는 박하 풀이 도처에 깔려 있어서 이 지역의 이름을 Yerba Buena[약초 혹은 박하 약초라는 스페인어]라고 지었다.
(이 이름은 1846년, 미국시대에 가서야 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Gaspar de portola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 알타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는 지금의 금문교 입구에서 천연항인 샌프란시스코 만의 북쪽 지역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 당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국토 분쟁 지역이었다. 1542년 스페인의 왕명으로 Juan Rodriguez Cabrillo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가 최초로 캘리포니아를 탐험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처음으로 발견했으며,
그 후, 1579년 영국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 경[Sir Drake]은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북쪽에 정박한 후 그 지역을 뉴 알비온이라고 이름짓고 그 지역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로 정하였던 지역이었다.
그 후, 1602년 Sebastian Viscaino[세바스챤 비스카이노]가 스페인의 깃발 아래 두 번째로 캘리포니아를 탐험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 후, 1700년대 후반부터 알라스카를 발견한 러시아인들이 남하하여 북 캘리포니아 지역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흐른 1799년부터, 러시아인들은 아예 북 캘리포니아 해안가 Bodega[창고라는 뜻의 스페인어] 만 가까이에 상륙하여 Fort Ross라는 요새를 만들었으며
[Fort Ross는 러시아의 항구라는 뜻으로 Ross라는 단어는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를 애칭으로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1812년부터는 러시아인들이 샌프란시스코 북쪽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영국과 미국 국적의 배들이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넘나들며 바다표범과 물개 밀렵을 하기 시작했고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바다 동물의 모피가죽과 고래 기름등의 무역 거래 활성화로 인해 러시아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어선들이 지금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 해역에 출몰하면서 급기야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역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아무튼, 러시아인들의 캘리포니아 해안가 출몰 소식에 불안을 느낀 스페인 국왕은 1769년 2월에 최초로 육지와 해상을 통한 Misionero[미셔네로] Junipero Serra[주니페로 세라] 신부를 주임 신부로 그리고 바하 캘리포니아의 집정관이었던 Gaspar de portola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 를 알타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로 임명하고 최초의 캘리포니아 탐험대를 이주민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 같은 분쟁 지역인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Gaspar de portola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주지사의 캘리포니아 탐험대는 3일 정도 더 체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