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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스쳐 가는 길도 다르게 보인다…다큐 "땅에 쓰는 시" 연합뉴스|입력 04.04.2024 09:08:50|조회 203
샛강생태공원·경춘선 숲길…1세대 조경가 정영선 작품세계 그려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 속 한 장면 [진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그 아름답던 풍경이 전부…난 아직도 거기를 가면 다리가 후들거려."

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씨는 사무치게 아름다웠던 아버지의 과수원이 어느 날 콘크리트 숲으로 바뀐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가 심은 무궁화가 집채만큼 커가고, 사과꽃이 떨어져 온 마당에 흩날리던 풍경은 이젠 사라지고 없다.

어릴 적 친구들은 남다른 감성을 지닌 정씨가 시인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시인 대신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우리 땅 곳곳에 생동하는 자연을 수놓는 조경사가 됐다. 정씨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 졸업생이자 국토개발기술사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이다.

서울 아시아선수촌아파트부터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선유도공원, 청계천,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물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도심에서 지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쉼터가 되어주는 공간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를 통해 정씨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풍경과 자연, 땅, 조경에 관한 그의 철학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타미 준의 바다'(2019),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2022) 등 건축 다큐멘터리를 선보여온 정다운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 속 한 장면 [진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감독은 정씨의 손길을 거친 공간을 천천히 이곳저곳 비추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두 시간 동안 아름다운 꽃과 풀, 나무, 물에 둘러싸여 있다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 정도다.

특히 샛강생태공원 장면에선 인구 1천만명이 넘는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나 싶어 입이 딱 벌어진다. 청둥오리가 노니는 강 양쪽에는 억새가 우거졌고 큼지막한 버드나무들도 허리를 굽힌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공무원들은 개발을 하랬더니 왜 풀만 심고 있냐며 정씨에게 삿대질부터 했다고 한다. 정씨는 "한강을 인위적으로 개발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샛강까지 그러라고 하니 미치겠더라"라고 떠올린다. 그는 "죽어도 샛강은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처음 계획을 밀고 나갔다. 이후 수달과 황조롱이, 수리부엉이 등 귀한 생명들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씨의 신념이 빚어낸 이색적인 풍경은 또 있다. 경춘선 숲길이다. 숲길 조성 전 기찻길에는 인근 주민들이 저마다 가꾼 텃밭이 있었는데, 정씨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없애지 않았다. 덕분에 숲길을 찾는 이들은 가을이면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밭 사이를 걸을 수 있게 됐다.

정씨는 조경이 단순히 꽃과 나무를 심는 작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간에 오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어우러질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 속 한 장면 [진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아산병원 정원은 그의 자연관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작업물이다. 이곳은 숲이 연상될 정도로 키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겨 있다. 환자나 보호자가 감정을 추스르거나 울고 갈 수 있도록 한 정씨의 배려다.

도시 곳곳의 조경에 이런 따스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심코 지나치던 길과 장소는 전과는 다르게 보일 것 같다.

개발 광풍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뿐만 아니라 흙을 밟고 살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도 자연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정씨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이다. 호미 하나를 들고 전국을 누비며 우리 꽃과 풀을 연구하고 작업 현장에도 손수 뛰어든다. 지난해에는 최고 영예로 꼽히는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상도 받았다.

17일 개봉. 113분. 전체 관람가.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 속 한 장면 [진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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