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Vs.미국 전쟁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샘 휴스턴은 미 정부에 공문을 보내 텍사스가 미 합중국의 일원이 될 것을 여러차례 촉구하였다.
이에 결국, 미국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845년 2월 텍사스를 미연방의 28번째 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당시의 대통령이 바로 제임스 포크였다.
멕시코 입장에서 미국은 은근슬쩍 남의 영토를 집어 삼킨 날강도 였고 미국은 - 이웃의 신생 국가가 요청을 해서 이를 받아드렸을 뿐 - 이라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텍사스를 합병한 미국은 리오 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여기는 반면 멕시코는 동쪽에 위치한 리오 누에세스강을 국경으로 여기는 바람에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재커리 테일러 장군에게 은밀한 밀명을 내렸다. - 국경을 넘어 멕시코 군을 도발하라 -
이에 1646년 3월 27일, 테일러 장군의 휘하 부대가 누에세스 강을 건너 리오 그란데까지 접근하여 <텍사스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아 낸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은 5월 1일,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미군이 건설하는 요새를 포위하였다.
일단, 요새를 포위하자 5월 3일을 기점으로 멕시코 포병은 일주일 동안 텍사스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포격으로 인해 미군 2명이 사망하자, 이를 빌미로 미 의회는 멕시코를 상대로 5월 13일 선전포고를 한다.
<텍사스 요새> 로 야기된 팔로 알토 전투에서 결판이 나지 않자, 5월 8일, 전황이 불리해진 아리스타 장군은 부대를 레사카 델 라 팔마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 본대는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5월 9일, 마침내 레사카 델 라 팔마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미군이 고전하는듯 싶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형의 가벼운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의 치고 빠지는 전술이 통하면서 승리의 발판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
무겁고 발사도 느린 멕시코의 총으로는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멕시코 군이 사용한 소총은 1세기 전인 나폴레옹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 때 사용되던 영국제 브라운 베스 계열로 사정거리도 짧은 구닥다리였다.
패전 당시 기습적인 미군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멕시코군은 여러 개의 대포와 아리스타 장군의 책상, 은식기 세트, 멕시코에서 칭송을 받던 탐피코 대대의 군기와 여러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겨우 몸만 빠져 달아났다.
참담한 패배를 맞이한 멕시코군은 삼삼오오 분산되어 <리오 그란데>를 건너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승승장구하며 멕시코를 남하하는 미군을 상대하기에는 멕시코의 전력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당시 두 나라의 인구 비율 (미국인구 2,320만 멕시코 인구890만)이나 낡은 군사 장비나 훈련 부족인 군대로 미군을 상대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훗날의 역사 학자들은 전한다.
이 후, 전장은 멕시코 뿐만 아니라 인근의 뉴멕시코와 아리조나는 물론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제임스 포크의 대통령 후보시절 공약이었던 < 북미 대륙 끝인 태평양 연안까지의 확장이라는 Manifest Destiny 이론 > 을 완성해가는 단계였다.
개전 전부터 미국의 공세는 이미 캘리포니아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