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크 대통령의 사람들>
7월 28일, 스톡톤 사령관은 전에 슬러트가 했던 것처럼 간락한 성명을 발표를 하였다.
“나는 캘리포니아, 혹은 그들의 주민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멕시코의 일부분이 되기를 고집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것이 나의 기본 방침이다.’
당시, 피오피코 주지사는 과거 멕시코에서 임명되어 왔던 주지사가 아닌 순수 캘리포니안들의 투표에 의해 당선된 캘리포니아 태생의 토박이 주지사였다.
시간이 감에 따라 카스트로 장군과 피오피코 주지사는 그들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미군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캘리포니아군은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서 미군과 맞서 싸울수는 있지만 피코 주지사는 결코 무력으로 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캘리포니안들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다면 굳이 싸울 필요성도 없지 않을까? 그것이 캘리포니아의 행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이에 1846년 8월 초 이 둘은 일단 멕시코로 몸을 피하기로 하였고 남 캘리포니아는 미군을 환영하는 태도로 전환되었다.
마침내, 8월 13일 스톡톤과 그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없이 로스앤젤레스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1만 5천의 인파들이 거리로 나와서 행진하는 이들을 환영하기까지 했다.
스톡톤은 그자리에서 자신의 위치를 새로운 주지사 자리로 스스로 승격 시켰다.
마침내 미군은 캘리포니아의 전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적어도 그때 만큼은 그랬다. 산발적인 전투가 있기는 했어도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캘리포니아를 장악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프레몬트의 부대 소속의 탐험가였던 존 비드웰(John Bidwell)은 몇년 후에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소노마부터 샌디에고까지 우리는 캘리포니아의 전지역을 성조기를 휘날리며 돌았는데 우리를 반대하거나 항거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적군을 찾아 보았으나 적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만의 시간이 흐른 후,
스톡톤는 자신의 임무는 끝이 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계속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멕시코 지역의 전쟁 상태도 궁금하기도 했고 멕시코 전선에 참여하고 싶기도 하여 캘리포니아를 떠나기로 작정 하였다.
그는 캘리포니아 사령관의 자리를 내놓고, 포크 대통령에게 직접 밀명을 받은 그리고 그 동안 절친하게 지냈던 프레몬트에게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를 넘겨주겠노란 약속을 히였다.
또 한, 그는 대통령을 직접 만나 밀명을 받았던 또 한사람인 아치발드 질레스피에게 로스앤젤레스 시 방위 사령관이란 직책을 주었고
키트 카손은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일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포크 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 전령사로 워싱턴을 향해 대륙을 횡단하여 떠나라는 명령도 내렸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이런 평화도 잠시, 스톡톤이 멕시코 전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캘리포니아의 평화가 깨지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