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뉴 알비온 지역을 엘리자 베스 1세의 소유로 문제 삼으면서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들 즈음인 1741년,
이 번에는 Alaska [알라스카]를 개척한 Russia (러시아) 선박들이 남하하여 캘리포니아 해역을 넘나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시 스페인 국왕 Felipe V[펠리페 킨토(필립 5세)]는 Alta California[알타 캘리포니아]의 인구 이주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과는 또 다른 대립 관계였던 러시아까지 개입한다면 캘리포니아의 운명은 그야말로 위태롭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시 러시아가 어떻게 캘리포니아 연안에 출현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 보고 가기로 하자.
1579년부터 시작하여1639년까지 시베리아 지역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탐험을 마친 러시아는 그 후, 1714년, 러시아의 피터 대제 1세의 명령을 받은 덴마크 태생의 베링(Bering) 해군 대좌가 시베리아의 동쪽 끝의 해협을 발견하면서
아시아 대륙과 북미 대륙이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러시아의 태평양 시대를 열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베링은 1727년 시베리아의 캄차카 반도에서 배 두 척을 건조하여 알류산 열도를 따라 항해를 했는데 그 때,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떠 밀려 낯선 육지에 상륙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곳이 오늘날의 알라스카였다.
이때 이곳에는 에스키모. 알류트 등의 인디안 족이 살고 있었는데 ‘알라스카’ 란 알류트족의 언어로 ‘위대한 땅’이라는 뜻이다.
1700년대 초에는 태평양 연안에서의 바다표범 사냥이 러시아와 영국 어선들을 알타 캘리포니아 만으로 끌어 들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러시아의 식민지가 된 알라스카는 원래 바다표범, 바다 코끼리 물개들의 서식지였는데 당시 모피산업이 최고로 발달했던 러시아는 알라스카에 전진 기지를 만들었으며
또 한, 그들은 알라스카에서 시작하여 바다 동물들을 찾아 점점 먼 바다까지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캘리포니아 해역까지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중국과 유리한 거래가 이루어지자 이 거래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 러시아는 1799년 Rusian American Fur Company 라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훗날, 그 무역의 거점 지역으로 북 캘리포니아 해안가 Bodega[창고라는 뜻의 스페인어] 만 가까이에 Fort Ross라는 러시아 요새를 만들고 1812년부터 1841년까지 실제로 러시아 인들이 거주하기도 했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50마일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 역사 보존 지역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 즈음, 영국도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넘나들며 바다표범과 물개 밀렵을 하기 시작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바다표범의 모피가죽 무역의 활성화로 유럽국가의 선박들이 자주 출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러시아와 영국이 지금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소노마 지역을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멀지 않은 훗날, 미국의 이민자들이 이 곳에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아무튼, 위기를 느낀 스페인의 국왕 Felipe V (펠리페 킨토; 필립 5세)는 Nueva España[누에바 에스파냐; 뉴스페인이라는 뜻으로 당시에는 멕시코를 이렇게 불렀다] 부왕에게 Alta California [알타 캘리포니아]의 이주를 명령함으로 그 이주 경로의 길을 ‘왕이 명령한 이주의 길’이라는 뜻으로 El Camino Real [엘카미노 레알]이라고 명명되어 졌다.
그래서 1769년, 최초의 알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임명 받은 Gaspar de Portola[가스파르 데 포르톨라]가 이끄는 육로를 통한 이민 행렬대가 이주를 시작함으로써 오랜 시간의 ‘캘리포니아의 탐험 시대’의 마지막 탐험이며 동시에 ‘캘리포니아 미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터닝포인트 모멘텀’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