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 새크라멘토 강 학살사건 2부는 원고분실 사고로 인해 게재 불능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독자여러분의 넓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845년, 캘리포니아 미국이 되어가는 과정
존 셔터의 왕국은 점점 발전하여 커져 갔으며 새로 오는 이민 정착자들의 일차적 목적지가 되었다.
대륙을 횡단하여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새로운 미국인들은 과거에 도착했던 미국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새로운 미국인 이민자들은 가족 단위였고 스페인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으며 기독교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마다 늘어나는 이들 아메리칸 들은 그들 스스로도 “우리는 캘리포니언이 아닌 아메리칸 미국인이다” 라며 멕시칸 법을 무시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1845년에는 800여명의 미국인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거주했다. 그 당시의 캘리포니아 스페인 계 백인 인구는 4000명 정도였다.
1845년의 봄과 여름철의 셔터는 그의 채권자들에게 갚을 빛에만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는 성채 주위 인디언들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그의 모든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부분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특히 밀 농작물로 갚기로 한 러시아의 부채에 대해서 좀더 신경을 썼다.
그는 4000마리의 소와 1500마리의 암말, 200마리의 당나귀와 요새 그리고 3000마리의 양과 염소, 돼지, 닭들이 있었다. 그의 농장의 직원들은 매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모자를 생산 한다거나 바구니를 짠다거나 양조장에서 술을 빚는다거나 혹은 말발굽에 편자를 박는 망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셔터는 두명의 총기 제작자와 두 명의 술통 제작자를 고용했고 마차 제작자와 몇 명의 목수도 구했다.
이들 중에는 1845년에 마차 행렬을 따라 대륙을 횡단하여 건너온 제임스 마샬(James Mashall)이 가장 훌륭한 목수였다.
1846년, 마침내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이 터졌다. 아울러 캘리포니아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캘리포니아 전투 참조]
그래서 존 셔터는 캘리포니아 정부의 눈치도 봐야했지만 그 역시 지금의 멕시코 정권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존 셔터는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일부가 되면 자기가 이룩한 새 스위스 공화국(New Helvetia) 인 셔터 요새는 어떻게 될 것인가 를 걱정하며 이제부터는 철저한 미국편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1846년은 캘리포니아에서는 가장 어수선한 해가 되었다.
1846년 6월 11일, 미국인 거주민들이 소노마 지역을 독립 지역으로 선포하였다.
그들 90여명의 미국인 무장 단체는 소노라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는 자신들이 제작한 리퍼블릭 캘리포니아 국기를 소노마 시에 게양하였는데,
이 것이 바로 캘리포니아의 독립국 상징물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캘리포니아 주기가 되었다.
그들은 베어 플랙(별과 회색 곰의 그림)국기를 소노마 시에 게양함으로써 캘리포니아가 독립국임을 처음으로 선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