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원주민에게 선교 활동을 원하는 가톨릭 교회의 요구와 Galleon(범선) 무역상들의 캘리포니아 보급 항만 필요성 주장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탐험 금지 조치는 지속되었다.
그러다가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새로운 압박 요소가 등장하면서 스페인 국왕을 긴장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영국이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지역 영토 주장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영국이 주장하는 영토 소유권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1559년 이 후, 태평양 건너 필리핀의 마닐라와 멕시코의 아카풀코 사이의 Galleon무역을 통해 동양의 보물들이 스페인 제국을 통하여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당시의 미개척지였던 캘리포니아 해안에 해적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 출신의 해적 Francis Drake는 Galleon 상인들로 하여금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나타난 영국 해적Francis Drake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해적 Francis Drake는1577년, 영국을 출발하여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 해안을 따라 1578년 브라질에 도착하였고, 그 해 8월21일에는 마젤란 해협에 진입하여 16일 만에 해협을 통과하여 태평양에 도달 할 수가 있었다.
그는 태평양 근해의 뉴스페인 해안을 다니며 상당량의 금은 보화를 스페인 선박으로부터 갈취하기 시작하면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선박에 대한 노략질뿐만 아니라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내륙 지역을 근거지로 ‘뉴 알비온’ 이라고 이름 짓고 그 지역을 엘리자 베스 1세의 소유라고 정했다. (그 지역에는 오늘날에도 Drake, New Alvion 등의 이름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당시, 그는 샌프란시스코 강을 따라가면 북아메리카에서 대서양으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드레이크는 그 지역의 원주민인 미워크(Miwoks)족의 환영을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샌프란시스코의 내륙 지역에서 한달 보름을 지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에서 대서양으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하지 못하자, 드레이크는 1579년 태평양을 가로 질러 필리핀에서 식수를 채운 뒤 인도양을 지나고 아프리카를 돌아서 2년 만에 다시 대서양으로 들어섰다.
1580년 9월 26일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해적선인 ‘The golden Haind’ 는 상당량의 금은 보화를 싣고 마침내 영국의Plymouth[플리머스]항구로 돌아갔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드레이크를 친히 마중했으며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그는 해적 드레이크에서 Sir Francis Drake로 명칭이 바뀌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1588년, 132척의 군함으로 조직된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함대 (Armada Invencible;아르마다 인벤시블레)를 앞세워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또 다른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생략 키로 하자)
아무튼, 당시 변변한 해군력이 없었던 영국에서는 해적 출신 Sir Francis Drake를 영국 해군 사령관에 임명하였고
해군 사령관이 된 Sir Francis Drake는 야간 기습 작전을 펼쳐 정박중인 스페인의 무적함대에게 강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쳐 불어오던 폭풍으로 인하여 무적함대는 괴멸 상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파견하여 잉글랜드를 제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Sir Francis Drake를 제독으로 내세운 잉글랜드 해군에 의해 격파되고 만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최강의 스페인의 무적 함대는 사라지고 영국 해군이 재해 권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후세의 영국 정부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뉴 알비온 지역을 엘리자 베스 1세의 소유로 문제 삼으면서 캘리포니아의 영토 분쟁 지역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훗날, 이를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내륙 지역에는 유럽의 비 스페인 계 즉, -영국, 프랑스, 스위스, 러시아, 캐나다.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로 진출하여 정착하는데 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