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에 나타난 존 프레몬트>
그러는 동안에 캘리포니아의 북쪽 지역에서 캘리포니아 방위군과 접전을 하고 있었던 존 프레몬트(John Fremont)는 미군이 로스앤젤레스를 재 탈환하기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1월 11일, 로스앤젤레스 북서쪽 인근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도착 다음날, 로스앤젤레스와 샌가브리엘 사이에 있는 카후엔가 통로(Cahuenga Pass)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나타난 존 프레몬트 중령은 캘리포니아 방어군 사령관인 안드레스 피코(Andres Pico)와 만나 공식적인 평화 협정에 사인을 하였다.
이 조약은 1847년 1월 13일, 지금의 노스할리우드가 된 캄포 데 카우엥가에서 승인을 하여 카후엔가 조약(Treaty of Cahuenga) 이라고 부른다.
이 협정에 의하여 미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모든 캘리포니아 방어군의 전쟁 행위는 모두 용서와 관용으로 덮어주고 동시에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용되었다.
그로 인해, 존 프레몬트는 캘리포니아의 주지사 물망에 오를 정도로 캘리포니아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는 인사로 추대되었다.
수 많은 부하들의 희생을 치루고 얻어낸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하급 장교인 존 프레몬트(당시의 계급은 중령)에 의해 이처럼 어이없는 평화 협정이 이루어졌음을 안 스톡톤과 커니는 몹씨 분개하였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희생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협정 내용 중 “모든 적군에 대한 용서와 관용” 은 이들을 분노케 만들었으나 같은 포크 대통령의 사람인 이들도 결국은 동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되었다.
마침내, 1847년 1월 14일 캘리포니아 전쟁에 참가했던 프레몬트와 4백여 미군 병력이 공식적인 로스앤젤레스 입성 거리 행진을 하였다.
그동안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지치고 피로한 기색의 상관과 병사들은 로스앤젤레스의 1월의 비를 맞으며 승리의 거리 행진을 하였던 것이다.
카후엔가 통로 (Cahuenga Pass) 에서의 평화협정으로 인하여 캘리포니아는 평화가 돌아왔고 이듬해인 1848년 2월 2일 미국과 멕시코 전쟁도 결말이 나서 ‘Guadalupe Hidalgo’ 조약이 체결되었다.